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글
이명박 나쁜 걸 알고, 거기서 바로 안티 이명박을 구상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는 근원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민주통합당을 뽑고 “왜 안 바뀌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이 좀 더 정교해야 하는 이유인데, 내가 그걸 할 깜냥은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은, 그런 일을 수행하려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의견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대강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 음악의 평가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 평가가 음악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정의한다.
- 오디션 프로그램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본다.
- 결론은 독자가 내린다.
1. 음악의 평가 가능성
클래식 음악이 그렇듯, 대중음악에도 발전해 온 역사가 있다. 블루스가 있었고, 뉴올리언스가 있었고, 컨트리가 있었고, 이것들이 묶여 록이 되고, 이게 영국으로 넘어가서 영국의 로큰롤을 형성하고, 그것이 역수입되고, 거장들이 서로 만나면서 영향을 주고받고, 장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혁신이나 혼성교배를 통해 새 장르가 탄생하고, 그 안에서 각 장르의 문법이 정해지고, 풍성해진다. 그러니 음악이란 전범의 산물이며, 그 안에서의 혁신과 창의 역시 그가 들어온 음악들의 영향권 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일종의 혼용문법 같은 것인데, 물론 이 문법은 생각만큼 strict하진 않다. 하지만 그게 문법은 문법이다.
아이유가 델타 블루스를 부르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중간에 변박을 넣을 수도 있고, 조바꿈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며, 펜타토닉 말고 다른 스케일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에 “아이쿠”가 들어가면 안 되고, 삼단고음도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특정 부위에서는 블루스 특유의 꺾임음을 더해야 할 것이고, 음을 눙치거나 딱 끊는 디테일도 연습을 통해 장착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블루스 팬들에게 쌍욕을 먹는 일은 피해야 할 테니까.
물론 아이유는 우월하기 때문에(…) 그런 디테일을 연습해서 맞출 수 있을 것이고, 로엔의 기타잽이 아저씨들도 프레이즈들을 그럴 듯하게 베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진정한 블루스의 혼이라고 평가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건 아니고(아이유부심이 너무 돋았네효.) 그게 아니라고 할 때, 그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로엔 사람들이 목화를 따 본 적이 없다든지 흑인의 정서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그렇게 따지면 에릭 클랩튼은 주인에게 매를 맞던 이들의 후예가 아니고, 목화도 안 땄으니 델타를 할 수가 없다. 인간의 삶이나 진정성은 파고 들어가면 꽤 많이 깨진다. 반대로, 음악 자체, 혹은 그 음의 구성 논리만 놓고 판단하면 얘기가 다르다. 에릭 클랩튼은 블루스의 문법(창작 전통)을 바탕으로 음을 생산했고, 그가 마음먹고 한 것들은 델타 장르의 미덕을 잘 구현하고, 일부 발전적인 변용도 성취했다. 그렇게 보면, 그를 좋은 블루스맨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식의 판단이 되려면, 음악 하나를 들을 때도 아티스트의 표현 기법, 기법에 대한 이해도, 디테일을 잡아내는 능력, 이를 형성해 낸 배경 역사(생애의 궤적, 들었던 음반, 장비 활용법, 기타 인터뷰 등)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고, 이를 이용할 때 청자는 자신의 호오를 정당화할 수 있다. 이는 꽤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으로 음악의 미덕/악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음악은 평가 가능하다. 그것도 상당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그래서 비평이 있고, 평론가가 있다. 이러한 판단이 정교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걸 “취향입니다.”라고 말할 만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좋잖아요! 짱이에요! 하는 가운데도 분명히 대조군이 있고, 자신이 이것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 그것을 표현하고 정교화시키는 게 까다로울 수는 있다(다시 말해 충분한 소통이 가능한 정교한 평가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건 자랑이 아니고, 권장할 만한 일도 아니다.
2. 평가의 역할
그렇게 정교하게 구성된 평가의 언어는 이 시대의 음악을 듣는 나침반이 된다. 세상은 더럽게 바빠 음악 들을 시간은 나날이 줄고, 들어야 할 음악은 나날이 늘어간다. 속는 셈치고 막 듣기엔 나쁜 음악도 너무나 많다. 그렇다면 1차 필터가 필요하고, 처음에 곡의 본질로 뛰어들 수 있게 해 주는 가이드라인도 필요하다.
아티스트가 음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이 부분에서는 천재적이고 이 부분에서는 고전적이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그 문법이나 표현력의 한계를 이렇게 넓혔다는 식으로 나름의 평가 기준과 결과를 제시하고, 전체적으로는 어떤 느낌의 음반이라고 짚어주는 글은 좋은 글이다. 이 글을 통해, 안 듣는게 나은 음반들을 찾아낼 수 있으며, 감상할 때도 모르고 넘어갈 만한 부분들에 더 집중할 수 있으며, 껄끄럽게 느껴지는 부분들에 대한 설명과 아티스트의 의도를 듣고 그 입장에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포인트는 깨끗하게 짚고, 방향도 아는 상태에서 음악을 더 깊고 포괄적으로 들을 수 있으며, 그 전체 판단에 동의/반대하거나 다른 판단 기준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이런 걸 취향의 발전이라고 하겠지.).
다시 말해 평가는 음악에 대한 기대치를 만들고, 이 기대치는 구매나 프로모션 음원을 통해 확인되고, 그것들은 다시금 수요를 창출해낸다. 능동적인 감상과 평가는 이런 방식으로 음악을 더 잘 팔 수 있게 해 주고, 좋은 음악은 더 정교한 취향과 평가를 만든다. 결국 비평이란, 아무리 악평이라도, 그 음악을 더 accessible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3. 오디션의 문제는 무엇인가?
오디션 프로그램은 (잘만 진행된다면) 이러한 평가 기준들을 상세하게 제공하고, 듣는 귀를 넓혀 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넌 이게 안 좋고, 이게 안 좋으니 이렇게 고쳐 보고 이런 곡을 해 봐라. 라는 식으로 멘토를 붙인다든지 하는 방식이 한 가지일 테고, 실제 그렇게 고쳤을 때 발생하는 미세한 디테일이 결국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디테일을 보는 눈을 키워 주기도 할 것이다. 이건 되게 행복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고, 실제 상황에서 그게 왜 안 되는지 생각해 보면 몇 가지 답이 나올 것 같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잘 안 보는 나는 최대한 말을 아껴야 하므로, 크게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
음악 판단 기준의 정형화, 음악 자체보다는 기교와 표현 능력에 천착하는 교정 패턴, 그리고 새로운 음악을 판별해 낼 만한 감수성의 부족.
음악 판단 기준의 정형화라는 것은 이렇다. KPop Star 같은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은 SM/YG/JYP를 대변한다. 그들이 수용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 내에서, 그들의 문법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안정적이고 표현력 있는 보컬로 요약되는데, 그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이 연습생을 훈육하는 방식에 맞추어 그들을 재단한다. 슈퍼스타K도 비슷한데, 여러 범위라고는 하지만 결국 전범이라 할 만한 곡들의 해석을 재생산하는 기교를 본다(시즌 3에서 자작곡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조금 이 궤를 벗어나기 시작하는 듯한데, 이는 다르게 다룰 얘기다.).
그 결과 정석적인 노래들을 그 곡에서 요구하는 만큼 아주 잘 부르는 친구들이 양산되고,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그러한 미덕을 알아볼 수 있는 감식안을 갖추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안정적이고 표현력 있는, 그러니까 기존의 해석 방식을 잘 구현하는 능력에 대한 평가에 그친다. 따라서 조금이나마 낯설 수 있는 취향의 음악가들인 정차식/요조/한희정 같은 아티스트들이 지닌 미덕은 판단 기준에서 배제된다. 이런 기준들이 평가 기준의 목록에서 배제되면서, 음악에 대한 지엽적 이해가 진정한 이해로 받아들여지고, 넓은 음악 취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
이는 두 번째 요인인 기교와 표현에의 천착이라는 점에서 다시 드러난다. 이는 오디션이나 서바이벌의 특성에서 나타나는데, 오디션의 핵심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전략적 판단을 돌려 보면 답이 나온다. 아주 좋은 노래를 만들어 평범한 기교로 부르는 것 / (사람들이 기대할 만한 포인트가 있고 판단 기준도 어느 정도 정립되어 있는) 전범들을 아주 잘 불러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 사이의 경중을 따져 보자. 정확한 기교와 표현을 강조하는 게 유리하다. 그런 부분에 대한 평가는 대중들에게 바로 표나는 내용들이므로, 주최측이든 참가자든, 오디션은 정확한 기교와 표현을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위에서 말했듯, 기존의 해석을 재현하는 능력이 음악 평가 기준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결과를 낳는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해석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그 해석 방식에 적절한 곡들이 생산되는지에 대한 과정은 은폐된다. 곡에 대한 감식안이나 장르에 대한 이해는 더욱 낮아진다.
이러한 현상이 계속될 경우 제공되는 음악의 폭은 계속 좁아질 수밖에 없다. 클래식에서의 “콩쿨 효과” 같은 것인데, 콩쿨이라는 제도를 통과한 이들에게만 활동 기회가 주어지면서, 혁명가들이나 독특한 음악가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음반에서도 가끔 미스터치를 내는 빌헬름 켐프, 템포를 쥐어뜯어버리는 레인버트 데 레우 같은 피아니스트, 허밍이 피아노소리를 덮고 반복과 트릴을 제멋대로 운용하는 글렌 굴드 같은 피아니스트의 재래가 쉽지 않은데, 이는 음악 소비에 장기적으로는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클리포드 커즌은 말했다. 콩쿨이 있었다면 자기는 데뷔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음악은 점점 정형화되고, 새로운 표현이나 실험보다는 공장제에서 잘 작동하는 부품들이 자꾸 시장에 유입된다. 실제 외국 오디션 프로나 국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이들이 음반에서는 차별화에 실패하여 사장되는 것, 이런 것들이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포맷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복잡다단한 판단 기준을 몇 명의 심사위원의 모임이 잘라 내는 부분이라든지, 드라마에 집착하는 악마의 편집 따위에 기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은 심사위원진 구성이라든지 경쟁 방식을 조금씩 바꾸어 대응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어쨌든 좀 더 다양하고 깊은 기준들이 세워질 수 있다면, 그 기준은 음악 창작의 복잡다단한 과정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음악판/장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내용을 풀어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음악이 그렇게 단순하게 “여기 좀 틀렸네, 공기가 어쩌구저쩌구” 따위의 말로 쉽게 재단될 수 없다는 것을 알릴 것이며, 음악이 쾌감을 주는 포인트는 음악 곳곳에 잘 숨어 있으며, 그 결을 펼칠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이 나타남을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감상하는 방법에 대한 가이드를 제공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드라마를 위한 음악이 아닌, 음악을 위한 드라마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좀 더 사람들에게 퍼먹일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점까지만 말하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는 건 대강 이 정도인데, 그 방법이 옳은 것일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구현해 나갈지까지를 다루지는 않겠다.
한 가지만은 짚고 넘어가자. “지금 있는 판은 희망이 없으니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판을 처음부터 짜 나가자”고 생각하는 것만이 길은 아니다. “어차피 떠먹여야 한다면 깔려 있는 큰 판에서 팍팍 먹이자”는 생각도 가능하다. 슈퍼스타K 시즌3이 그랬듯.
방향이 그르다든지, 실현 가능성이 어떻다든지 하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두 개의 길이 있다. 둘 다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도 가야 한다면, 가야지. 하지만 그 전에 기존의 판이 왜 그렇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왜 성공했는지에 대한 심도깊은 고민과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초극을 하든 개량을 하든 알아야 할 것 아닌가.

